포맷 혁신이 남긴 유산과 앞으로의 과제
서바이벌 예능이란 장르는 그야말로 '과포화' 상태다. 어디를 틀어도 탈락자, 연합, 반전, 배신이 넘쳐난다. 시청자들은 이미 식상한 룰에 학습돼 있고, 참가자들은 유튜브 알고리즘을 닮은 행동 패턴을 반복한다. 이런 판에 정종연이라는 이름은, 오래된 게임판을 엎어버릴 용기를 낸 몇 안 되는 연출자 중 하나다.
그의 이름은 '더 지니어스'와 '대탈출'을 거치며 장르를 새롭게 정의해왔다. 그리고 '데블스플랜'은 그 정점이자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포맷이 아니라 ‘질문’을 판 위에 올린 예능
'데블스플랜'은 단지 룰이 독특하거나, 스튜디오가 화려해서 돋보인 게 아니다. 이 예능은 포맷 자체에 ‘질문’을 심는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는 이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이긴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기존 서바이벌 예능은 정답을 강요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누구의 전략이 우수한지 빠르게 판별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데블스플랜은 정답보다 딜레마를 판 위에 올린다. 어느 선택도 100% 옳을 수 없고, 어떤 행동도 100% 나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전시하는 실험실이다. 이 포맷은 누가 더 똑똑한가가 아니라, 누가 더 복잡한 사람인가를 드러낸다.
연출은 철학을 덜어내고 감정을 남긴다
정종연 PD의 스타일은 단순히 '게임을 잘 만드는 사람'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그의 연출은 항상 서사 구조와 인간 심리를 전제로 움직인다. 데블스플랜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라운드를 붙여 나열하지 않는다. 참가자들의 인과관계, 감정선, 고뇌의 흔적까지 연결한다.
심지어 그 감정은 무겁고, 무채색에 가깝다. 이 예능에는 통쾌한 승리도, 속 시원한 배신도 거의 없다. 대체로 어딘가 찝찝하고, 누군가는 멘탈이 무너진 채로 퇴장한다. 시청자조차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는 거지' 하는 불편함을 느낀다. 그 불편함은, 우리가 얼마나 경쟁에 길들여져 있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즉, 정종연 PD는 ‘드라마 같은 예능’을 만든 게 아니라, 예능의 탈을 쓴 인간 드라마를 만들었다.
데블스플랜이 남긴 유산: 게임이 아니라 인간을 설계한 포맷
데블스플랜이 예능 판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바로 ‘인간 중심적 설계’다. 이건 출제자가 문제를 내고, 참가자가 푸는 방식이 아니다. 참가자가 문제를 만들고, 답은 없으며, 그 모든 과정을 시청자가 해석하는 구조다.
이런 구도에서는 제작진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감정선이 꼬이면 맥락이 무너지고, 편집의 방향이 흐려지면 몰입감은 사라진다. 실제로 데블스플랜의 후반부에서는 과도한 감정 소비와 피로감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포맷이 너무 ‘무겁게’ 설계되어 있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이건 실패가 아니라 ‘확장’이다. 오락이라는 틀 안에서, 어디까지 인간의 본성을 끌어낼 수 있는지를 실험한 첫 시도였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과제: 다시 판을 뒤엎을 것인가, 제도를 만들 것인가
문제는 다음이다. 데블스플랜은 실험이었다. 실험은 늘 예외가 허용된다. 하지만 시즌2가 제작된다면, 그건 실험이 아니라 ‘제도’가 된다.
그러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종연 PD는 다시 한번 판을 엎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성공한 ‘플랜’을 반복하게 될까?
시청자는 실험을 원하지만, 플랫폼은 안정적인 성공을 요구한다. 데블스플랜이 넘어야 할 진짜 난관은 게임이 아니라 기획 그 자체가 시스템에 흡수되지 않도록 저항하는 일이다.
정종연의 데블스플랜은 분명 ‘차별화된 포맷’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 진짜 의미는, 새로운 게임을 만들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예능이라는 장르에 대해 가졌던 선입견을 해체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게 진짜 무서운 일이다. 이제 관객은 더 이상 '누가 이기나'만 보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심지어 그 선택이 나와 닮았는지까지 들여다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정종연이 만들어낸 새로운 룰이다. 예능이 게임에서 심리로, 심리에서 인간으로 이동한 결정적 순간 말이다.
'너머의 생생정보 > 방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연자 vs 제작진: 데블스플랜에서의 진짜 권력자는 누구인가 (0) | 2025.05.01 |
---|---|
데블스플랜 속 심리 게임의 메커니즘 해부 (0) | 2025.05.01 |
데블스플랜의 서바이벌 전략: 인간 심리의 경계를 넘나들다 (0) | 2025.05.01 |
전문직 드라마의 수요와 시청자 심리: '슬기로운 의사생활'부터 '변호사들'까지, 우리는 왜 그들의 이야기에 끌리는가? (0) | 2025.04.13 |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 전공의들의 성장과 갈등을 그리다 (0) | 2025.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