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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와 번아웃 – 왜 우리는 아이 앞에서 웃는 척을 하게 되는가

2mhan 2025. 4. 10.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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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척, 여유 있는 척, 행복한 척”

육아를 하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표정이 있다. 공원에서, 병원 대기실에서, 키즈카페에서.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동자는 지쳐 있고, 말끝엔 묘한 피로가 묻어 있는 표정.
그건 단순한 피곤함이 아니라, ‘번아웃’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할 감정의 고갈이다.

그런데 이 번아웃은 좀 이상하다. 직장처럼 명확한 평가도 없고, 성과도 없는데 왜 이렇게 지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감정은 무한하지 않은데, 육아는 그 무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부모니까 당연하지’라는 말이 만든 감정 노동의 덫

육아는 감정의 노동이다. 그것도 지속적이고 불규칙하며, 휴식이 없는 감정 노동이다.
아이의 분노를 받아주고, 불안을 달래고, 기분을 맞추고, 울음을 끌어안고…
그 과정에서 부모는 자신의 감정을 끊임없이 조율한다. 아니, 억누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문제는 그 감정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힘들다고 하면 “다 그렇게 키웠어.”
버겁다고 하면 “애는 금방 크는데 뭘.”
우는 아이 앞에서 화를 내면 “부모가 왜 저래.”

결국 부모는 침묵한다. 웃는 척, 괜찮은 척, 여유 있는 척을 반복하면서, 번아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의 고갈을 아이 앞에서는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번아웃의 본질은 ‘고립’이다

아이 앞에서 웃는 척을 하게 되는 건, 내가 약해 보이면 안 된다는 감정의 고립 때문이다.
공적 시스템의 돌봄은 턱없이 부족하고, 주변 가족의 지원도 줄어들었다. 현대 육아는 고립 속에서 감정의 책임을 오롯이 ‘개인’이 지는 구조다.

그러다 보니, 부모는 스스로를 이렇게 몰아세운다.
“내가 부족한가?”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다른 부모들은 잘만 하던데…”

하지만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무관심이 만든 집단적 번아웃이다. 감정을 돌보지 않는 사회, 육아를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부모에게만 책임을 떠넘긴 결과다.

육아 번아웃은 ‘내 감정을 없애는 연습’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번아웃이 지속되면, 감정 자체를 마비시키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짜증이었지만, 나중에는 무감각이 된다.
처음엔 눈물이었지만, 나중엔 아무 표정도 짓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 앞에 서서, 다시 웃는 척을 한다.

그 웃음은 진짜 웃음이 아니다. 감정을 표현할 여유도, 느낄 힘도 없다는 신호다.
아이에게 중요한 건 부모의 완벽한 표정이 아니다.
진짜 필요한 건 ‘감정을 가질 수 있는 부모’, 그리고 그 감정을 말할 수 있는 환경이다.

우리는 왜 번아웃을 말하지 못할까?

육아에서 번아웃을 말하는 순간, 사회는 부모를 ‘무능력한 사람’으로 본다.
“그렇게 힘들면 왜 애를 낳았냐”는 말은 육아 고통을 무시하는 사회의 잔인한 민낯이다.
하지만 번아웃은 ‘못 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혼자 다 하려는 사람’이 되는 순간 시작된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나도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우는 걸 아이가 본다고 해서, 그 아이가 불행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건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을 함께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아이 앞에서 웃는 척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감정을 감추는 훈련을 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은 척’이 육아의 미덕이 되지 않아야 한다.
번아웃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사회가 돌보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다.

육아의 번아웃을 말할 수 있을 때, 진짜 회복은 시작된다.
그건 커다란 해결책이 아닐 수도 있다.
잠깐의 침묵, 작은 도움 요청, 짧은 낮잠, 친구와의 메시지 한 줄…
그 조각들이 부모의 마음을 붙들어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아이 앞에서 웃는 척을 멈추는 순간, 부모는 비로소 사람이 되고,
아이에게도 진짜 감정을 가진 어른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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